밀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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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정호승




그동안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나무가 되기를
더이상 봄이 오지 않아도 의자마다 싱싱한 뿌리가 돋아
땅속 깊이깊이 실뿌리를 내리기를
실뿌리에 매달린 눈물들은 모두 작은 미소가 되어
복사꽃처럼 환하게 땅속을 밝히기를

 

그동안 내가 살아오는 동안 앉아 있었던 의자들은 모두
플라타너스 잎새처럼 고요히 바람에 흔들리기를
더이상 새들이 날아오지 않아도 높게 높게 가지를 뻗어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기를

 

 

나는 왜 당신의 가난한 의자가 되어주지 못하고
당신의 의자에만 앉으려고 허둥지둥 달려왔는지
부서진 의자를 다시 부수고 말았는지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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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과 감상>

   이 의자에 대하여 조용히 묵상해 보라. 혹여 세상 의자를 차지하려고만 허둥지둥 달려오지는 않았는가.

 지금껏 내가 앉았던 무수한 의자들처럼 나도 과연 가난한 타인을 앉혀주는 그런 의자가 되어본 적 있었던가.

 이 시가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산다는 게 뭔가. '작고 낡은 의자에 한번 앉았다가/일어나는 일'이라 한다.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자각과 통찰이 절절이 스며든다.